삼년산성, 돌담 너머로 이어진 신라의 숨결

2025. 5. 6. 19:16여행

어느 흐린 봄날 고향에 있는 산성이지만 30년전 입구만 보고 왔던 기역이 있는데 이번엔 제대로 한바퀴 돌아 보고자는 마음으로 방문을 했다. 충청북도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이라는 이름은 나에게는 낯설지 않지만, 어쩐지 오래된 비밀을 품고 있을 것 같았다. 신라의 숨결이 스며든 그곳, 역사의 한 조각을 만난다는 설렘은 길 위의 피곤함도 잊게 했다.

보은읍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뱃들산 자락. 삼년산성 입구에 도착하자, 등산로처럼 조성된 탐방로가 숲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숲은 봄 기운에 잠에서 덜 깨어난 듯 조용했고, 길 옆으로 간간이 도토리 나무들이 싱그럽게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을 걷다 보니, 거대한 돌담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수백 년 전 시간의 문턱을 넘어온 듯한 순간이었다.

성벽은 생각보다 높고 견고했다. 일정한 크기의 돌들이 질서 정연하게 쌓여 있었고, 군데군데 무너진 흔적조차 세월의 무게를 웅변하는 듯했다. 신라 사람들이 손으로 하나하나 올렸을 그 돌덩이들이 만들어낸 이 거대한 산성은, 단지 방어의 목적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들의 생존과 신념, 그리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의 상징이었으리라.

걷다 보니 성벽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다.

안으로 들어서니 꽤 넓은 평지가 펼쳐졌고, 곳곳에 옛 건물터와 우물터, 배수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물터는 유난히 마음을 끌었다. 지금은 물이 말라 있었지만, 과거에는 병사들과 백성들이 목을 축였을 것이다. 전쟁 중에도 생명을 지탱해 주었을 그 물, 그것은 곧 희망이자 삶이었다.

그곳에 서 있으니 자연스레 상상이 이어졌다. 삼국이 피 말리는 전쟁을 벌이던 시절, 이 성 안에서 군사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까.

남문지

적군이 몰려오던 어느 날, 이 산성 안에 모여든 사람들의 눈빛은 두려움과 결기로 빛났을 것이다.

삼년 동안 싸웠는지, 삼년에 걸쳐 쌓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삼년’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성이라는 사실은, 그 돌 하나하나가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

산성의 한쪽 벼랑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보은읍이 한눈에 들어왔다.

보은읍

그 너머로 산과 들, 그리고 하늘이 어우러져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옛 전쟁의 흔적을 품은 이곳에서 나는 평화를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지나간 시간들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 아닐까.

동문지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시 성벽을 따라 걸었다. 손으로 성벽의 거친 표면을 한번 쓸어보았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손끝에 남았고, 그 속에 담긴 신라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말없이 지나간 세월은 그곳에 고스란히 스며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짧지만 진한 시간 여행을 한 듯했다.

밖에서 바라본 북문지

삼년산성은 단지 오래된 돌담이 아니다. 그것은 신라의 역사이자, 우리의 뿌리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유산이다. 역사책 속에 갇혀 있던 과거가 이토록 생생하게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다음에는 이곳을 가족들과 함께 다시 찾아, 그들에게도 이 느린 감동을 나눠주리라고.

북동치성
보은사
서문지

삼년산성이 백제의 유산이라고 보는 이유

  1. 위치와 축조 양식:
    삼년산성은 충청북도 보은에 위치해 있으며,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엔 백제의 영향권이었습니다. 또한 산성의 축조 방식이나 구조적 특성이 백제 계통의 다른 산성과 유사하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2. 백제의 내륙 방어 전략과 일치:
    백제는 한강 유역을 잃은 뒤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천도하며 내륙 방어선 구축에 주력했습니다. 삼년산성은 내륙 방어의 핵심 요충지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크고, 이 전략과 맞물려 백제의 축성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3. 삼년산성이라는 명칭 자체의 전승:
    "삼년간 버텼다"는 전설이 있는데, 일부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맞서 3년간 항전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물론 이는 역사적 기록보다는 구전에 가깝지만, 백제와 연관된 기억이 지역민에게 오래 남아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반대로 신라의 유산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함

  1. 신라의 북방 진출 시기와 일치:
    삼년산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시기는 6세기 전후로, 신라가 충청 내륙까지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입니다. 특히 진흥왕 대에 이 일대는 신라로 편입되었고, 실질적 지배권은 신라에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2. 고고학적 자료와 출토 유물:
    성 안에서 출토된 유물 중 일부는 신라 계통의 토기나 기와 양식과 닮아 있다는 분석도 있어, 신라가 축조하거나 운영한 산성일 가능성도 충분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 결론: 명확한 정설은 없지만 신라 축조설이 더 유력

  • 현재 학계에서는 신라가 6세기 무렵 축조했거나, 적어도 운영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합니다.
  • 다만, 위치상 백제의 옛 영역에 있던 점, 유물의 혼재 양상 등을 고려하면 백제 → 신라로 넘어간 경계 지역의 복합적 성격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처음엔 백제의 산성이라 들었지만, 성 안에 서서 설명문을 읽고 나니 이곳은 오히려 신라의 흔적이 더 짙다는 걸 느꼈다. 삼국이 치열하게 맞부딪히던 이 땅에서, 누가 쌓았든 결국 이 성은 한 시대의 격돌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